2008. 7. 27

성경  삼하 19:31~39
제목  이 시대의 바르실래


고국을 떠나 사는 여러분을 보면서 제가 늘 우려하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국에 살면 자연스럽게 채워질 것들이 외국에 산다는 이유 때문에 모자라게 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일 많이 피부로 느끼는 것은 좋은 사람을 자주 만나지 못한다는 것일 겁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주변 사람들이 좋지 않다거나 또는 여러분의 인간관계가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해서라는 것 때문이 아닙니다.
우선 환경 자체가 한국 같지 않습니다.
만나는 사람의 숫자나 계층이나 연령대가 절대적으로 폭이 좁고, 무엇보다 외국에서 살아내야 하는 이곳 한인들의 여러 환경적 요인이 만남 자체를 축소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이곳에 있는 외국인들을 많이 만나는 것으로 그 부족분을 채울 수도 있겠지만 그것 또한 쉽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좋고 편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나 확률이 고국보다는 현저하게 적어집니다.
또 이것을 타인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사람에게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 주는 일도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국내에 계시는 많은 분들이 우리 같은 해외체류자들과 교류를 해 보면서 우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느끼는 점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네 삶은 확실히 각박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변에 좋은 사람을 많이 두는 것과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인생의 풍요라는 측면에서 보면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한 번 여러분께 질문을 드려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힘들고 지칠 때 앞뒤 생각 안 하고 맘 편하게 얘기하거나 전화 걸 사람이 있습니까?
있다면 몇 명이나 있습니까?
아마도 우리들 대부분이 그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곳에서 뿐 아니라 모처럼 한국에 나가면 예전에 비해 만날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곳에서건 고국에서건 우리 곁에 좋은 사람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겁니다.
아울러 누군가의 뇌리 속에 좋은 사람으로 기억됐던 내 존재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부분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해도 그 손실을 복구할 수 없는 인생의 비극입니다.
아울러 그것은 땅 끝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구원해야 하는 우리들 소명자로서는 불충하고도 흠 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직접적인 복음의 선포나 능력이나 구제를 통한 구원보다도 우리들이 좋은 사람,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것으로 당신을 보여주기를 더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은 또한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며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될 것인지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좋은 사람의 모델로 삼을 바르실래는 다윗 왕 시대의 사람입니다.
다윗의 전 생애를 걸쳐서 보자면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사람입니다.
인간관계라는 게 꼭 세월에 비례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단 몇 번 만나고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다윗이 바르실래를 만난 것은 아무리 많이 잡아주어도 다섯 번을 넘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있어서 그의 그림자는 평생 지워지지 않게 됩니다.
오늘 바르실래의 행적을 같이 따라가 보십시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배우십시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 시대의 바르실래가 되는 것은 너무나 절실한 문제입니다.
이 시간 깨닫고 배우는 가운데 모두 그런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시간이 지나가도 변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원래가 상황과 환경에 따라 변하고 이해 득실에 따라 치우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힘있는 사람에게 줄을 대고 섰다가도 그가 힘을 잃으면 금방 다른 줄에 서는 게 인간이란 말씀입니다.
바르실래는 다윗이 어려울 때나 평안했을 때나 그 태도가 한결 같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다윗은 생애 십 년 가량을 쫓기면서 살았습니다.
그 와중에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이 아마 제사장 아히멜렉의 일일 것입니다.
왕궁에서 도망 나와 쫓기던 때에 삼 일을 굶다가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나게 되지요.
그는 다윗에게 떡을 주고 골리앗의 칼을 주는데, 나중에 그렇게 다윗을 도운 것 때문에 자신을 포함한 친족 85명이 한 날 몰살당하게 됩니다.
다윗으로서는 자기를 돕다가 그런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평생의 한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왕이 된 후에도 또 그런 일이 생깁니다.
셋째 아들인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전세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맨발로 예루살렘을 탈출합니다.
그렇게 쫓기는 중에 마하나임이라는 곳까지 오게 되는데, 바로 그때 바르실래를 처음 만나지요.
바르실래는 식량은 물론이고 침상과 대야와 그릇 등 생필품 일체를 가져와서 다윗 왕을 쉬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80의 노령이라면 분명 옛날 아히멜렉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다윗을 도왔다가 압살롬에게 어떤 일을 당할 지 모르는 일입니다.
실로 그가 한 일은 목숨을 걸고 한 행동이었습니다.  
아마 다윗으로서도 어쩔 수 없어서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옛날의 그 끔찍한 기억이 다시 떠 올랐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일이 두 번 다시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힘을 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다행히 반란이 잘 진압돼서 다윗은 환궁하게 되는데, 그때도 바르실래는 요단 강까지 나와 왕 일행이 강을 건너는 일을 도와주게 됩니다.

사실 도와줄 만한 여건에다 자기 안위에 별 탈이 없는 경우에 누구를 돕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자기 목숨과 전 재산을 담보로 누구를 도와준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뭣보다도 바르실래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그는 아무 대가없이 이 모든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에게 사례를 하려고 하자 그것을 끝내 사양합니다.  
그렇게 그의 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았습니다.
처음에 품었던 마음이 나중에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또 그것은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소극적인 말도 아닙니다.
뭔가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 혁신의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동유럽을 다녀 보면 유명한 건물이 잘 보존되어 있기는 하지만, 시커먼 때가 덮고 있어서 오히려 흉해 보이는 광경을 봅니다.
건물 자체는 변함이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두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서유럽처럼 끊임없이 돈을 들여서 때를 벗겨내고 보수 관리해야 건물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 생활 가운데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인격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많아지고 받은 재능과 능력이 아무리 탁월해도 여러분이 다른 이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울리는 꽹가리가 될 뿐입니다.
좋은 사람은 변함이 없는 사람인데 그것은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르실래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냥 되어진 게 아니라 다윗을 계속 마음에 품고 그를 생각해서입니다.
아마도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위해 끊임없이 뭔가를 했기 때문에 변치 않은 것이지 각오와 다짐으로만 된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가 오랜 만에 여러분을 만나서 “참, 너는 변함이 없구나!” 라는 말을 하면 여러분은 그것을 둘 중에 하나로 들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는, ‘너는 지금이나 옛날이나 발전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구나’ 이고 또 하나는 ‘너는 지금이나 옛날이나 나아지려는 노력없이 계속 뒷걸음질 치고 있구나’ 그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변함이 없다는 것은 현상유지라는 말이 아니라 발전과 성숙의 의미입니다.

좋은 사람을 곁에 두는 것과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뒤로 미룰 일이 아니라 지금 바로 할 입니다.
외국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더더욱 노력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 공을 들이지 않으면 나중에 우리 주변엔 아무도 없을 지 모릅니다.
좋은 사람이 떠나가지 않도록 그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나 자신부터가 그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투자한 만큼 돌아오는 것은 꼭 경제원칙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계속 머물도록 힘쓰고 또 끊임없는 노력으로 좋은 사람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좋은 사람은 자기를 바로 아는 사람입니다.
다윗이 바르실래에게 고마움을 느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위기 때나 평화 시에나 바르실래는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다윗으로서는 당연히 은혜를 갚고 싶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를 왕궁에 데려 갈 생각을 했을것입니다.
그런데 바르실래는 몇 가지 이유를 들어서 다윗과 함께 갈 것을 사양했습니다.
자칫 왕의 권유를 묵살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의 이유를 들어보면 그 사양이 정중하고도 완곡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이 34~35절을 읽으십시다)
“바르실래가 왕께 고하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삽관대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내 나이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오히려 누를 끼치리이까”  

무슨 말일까요?
자신은 늙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판단력도 믿을 수 없고 좋고 나쁨의 기준도 잘 분별 못한다는 겁니다.
또한 살 만큼 살아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판국인데 잠깐 좋은 것에 뭐 목을 매겠냐 그겁니다.
이 모든 것은 자기를 추하게 만들 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 바르실래가 한 말은 80 노인으로서 다 사실일 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 반대일수도 있습니다.
진짜 분별 못하고 물인지 불인지 모르는 80 노인은 이런 얘기 못 합니다.
그런 까닭에 오늘 이 바르실래는 왕궁에 들어가 좋은 것들을 누릴 충분한 지혜와 이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자기 때문에 신경 쓸 다윗왕을 생각하고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정말 고매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울러 그가 다윗에게 베푼 것은 무슨 대가를 바라고 한 게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건강한 자존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순수한 것을 지키려고 하는 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잔치 자리에 초대받게 되면 낮은 자리를 찾아갈 것을 권유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가장 꼴불견인 모습은 본인에게 걸맞지 않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자기 한계를 명확히 알고 장단점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래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알게 되고, 그래야 다른 사람을 올바르게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라디오 스타’라는 영화를 보셨지요?
왕년에 가수 왕이었던 사람이 지방 방송국의 라디오 DJ로 추락하면서 일어나는 일화를 그린 얘기입니다.
인상 깊은 장면이 여럿 나오는데, 무엇보다 매니저의 절대 헌신 속에 아직도 자기가 스타라는 환상에 젖어 있는 주인공이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아 가는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어떤 얘기든 마찬가지지만, 그 모습이 어찌 됐든 진짜 자기의 모습을 찾는 것은 가장 아름답습니다.
여러분 역시 가장 아름다울 때는 자기의 진짜 모습을 보여 줄 때인 것입니다.
자기를 바로 안다는 것은, 믿는 이들이 가져야 할 가장 귀한 소양입니다.
바르실래가 범인(凡人)이 아니라는 것은 오늘 자기가 한 몇 마디 중에 충분히 나와 있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이런 그의 모습 때문에 더 오래 깊이 바르실래를 그리워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생각만 해도 위안이 되는 좋은 사람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 그렇게 자신을 제대로 알고, 겸손하게 처신함으로서 누군가의 추억 속에 좋은 사람으로 오래 동안 기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사람은, 자기 보다 더 좋은 사람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있는 사람입니다.
바르실래로서는 다윗이 자기를 왕궁에 데려가려는 이유가 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그게 불의한 것을 알면, 신하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힘있고 전도 유망한 압살롬은 다윗의 사람들에게도 힘의 상징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따랐고, 반란이 수습되긴 했지만 왕의 리더쉽엔 금이 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통치를 해 나가는 것도 점점 힘에 부칠 것이고, 그럴수록 다윗은 더욱 외로운 자리에 머물러 있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때 지혜롭고 마음을 헤아려주는 바르실래 같은 친구는 더더욱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르실래는 이런 것을 충분히 다 헤아리고 있었지만 그 자리에 늙은 자기가 가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왕에게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김함이라는 사람을 천거합니다.
아마도 분명히 바르실래만큼 사려깊고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젊기 때문에 더 오랫 동안 다윗왕에게 충성을 다 했을 것입니다.

사실, 어떤 자리에 자기보다 더 좋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질투 날 일이고 또 그런 사람에게 자리를 빼앗기는 것은 뼈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좋은 사람은 자기조차 객관화 시킬 수 있는 사람이요, 자기보다 더 좋은 사람에게 자기 자리를 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르실래인들 왕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자기는 정중하고 완곡하게 자기 마음을 다윗왕에게 드러냅니다.
(37절 말씀입니다. 다같이 읽어 보실까요?)
“청컨데 종을 돌려 보내옵소서. 내가 내 본성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컨데 저로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옵시고 왕의 처분대로 저에게 베푸소서”  
    
아프간 피랍 사건이 벌써 일주년이 됐습니다.
온 국민을 걱정과 근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던 그때, 그래도 어둠 속의 빛처럼 아름다운 한 가지 기억이 떠 오릅니다.
탈레반들이 여자 포로를 석방하기 시작했을 때 그 첫 대상자로 지명되었던 자매 중 한 사람이 자기 대신 다른 자매를 보내줄 것을 부탁하지요?
그래서 실제 일은 그렇게 진행됐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게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자기가 풀려날 수 있는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다?
이것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제게 그런 일이 생겼다면 저는 백번이고 제가 나왔을 것입니다.
물론 그 자매는 다른 건강하지 못한 자매를 생각했을 뿐이라 그랬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냐 그 말씀입니다.
경우야 다르지만 더 좋은 사람, 더 풀려나는 게 시급한 사람에게 자리를 내 준 것은 두고두고 귀하고 아름답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은 자기보다 더 좋은 사람을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저나 여러분 그렇게 살도록 더욱 힘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여러 말씀을 드렸지만 이 시간 다시 한 번 제자들을 생각해 보십시다.
그들이 죽기까지 복음을 전했던 그 원동력은 어디 있었을까요?
단지 예수님이 보여 주신 그 능력과 위엄과 카리스마 때문이었을까요?
예,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그 신성은 오히려 제자들에겐 두려움과 거리감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릅니다.
그것보다는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예수님의 추억이 제자들을 독려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자기들과 겪어냈던 그 수 많은 일들 가운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만약 그들이 처음부터 주님이 창조자시고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들은 그 거룩한 분 앞에서 어떻게 운신해야 할 지를 찾지 못했을 것이고, 그 모든 행동 하나 하나는 너무나 부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등병이 참모총장과 한 방을 쓸 경우에 생기는 막막함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본인 스스로 제자들의 친구가 될 것을 다짐하시고 실제로 그렇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15:15)    
친구기 때문에 못할 말이 없고 친구기 때문에 못할 일이 없다는 말씀이십니다.
그렇게 좋은 친구가 이제는 성령으로 자기 속에 언제나 함께 있으니 두려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세상에 많은 좋은 사람을 둘 수 있지만, 그러나 무엇보다 시공을 초월해서 늘 내 곁에 계신 친구 예수님을 둡시다.
죄인들과 세리들과 창녀들 사이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셨던 예수님, 혼인 잔치 집에서는 하객들과 어울리며 즐거워하셨을 예수님, 병자들이 성한 몸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약동하는 생의 충만감을 느끼셨을 그 소박한 친구, 예수님을 기억하십시다.  
그리고 거기서 경이로운 우리 생의 기쁨을 발견하십시다.
아울러 우리 역시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처럼, 친구로 좋은 사람이 되어서 그들과 우리 자신의 생을 풍요롭게 하십시다.

함석헌 선생의 시 중에서 요즘 많이 알려진 시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인데 이렇습니다.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런 친구가 우리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친구가 없는 것을 한탄하지 말고,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이런 친구가 되어 줄 수는 없을까요?
사람으로서는 없지만 이미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친구가 되어 주셨고, 이제는 우리들이 당신처럼 다른 이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길 바라시고 계십니다.
누군가 나를 믿고 처자를 다 맡기면서 천리 길을 떠나도록 하는 그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좋은 친구, 좋은 사람이 되어준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본인의 삶이 더없이 풍요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원동력은 그런 좋은 친구 예수님이 자기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을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몰라서 그렇지 우리에게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종이 아닌 친구로 우리를 대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들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용서하시지 않겠습니까?
빙긋이 웃으시면서 우리 푸념을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친구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그 분의 광채를 받은 저와 여러분 역시 좋은 사람으로 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살 맛나고 풍요롭고 살아갈 의욕이 퐁퐁 솟는 기쁨이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오늘 바로 일어나게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